나의 이야기

최종

비단초여 2019. 12. 2. 15:47

부수 골 고추연가

 

내가 이곳 부수 골(비싯골이라고도함)로 귀농한지도 벌써 두성상이 넘었다.

아이엠에프가 한창이던 1998년 늦가을쯤 이었으니, 이곳이 반고향이나 다름 아니다.

행정구역을 굳이 따지자면 육지속의 오지라 알려진 영양군 입암면 연당리 이다.

지금은 담양 죽세원과 함께 영양 '서석지'로 더 유명한 마을이다.

농사라고는 지어본적이 없었으나 농촌에 귀농한 이상 농사를 아니질 수도 없었다.

이곳이 고추로 유명한 영양고을이니 고추 아닌 다른 꿈꾸지도 않았고,

오직 고추농사만을 여태 짓고 있다.

처음 왔을 때는 남의 땅을 도지 내어 고추농사만을 죽자 사자 지었다.

5년 전에 이웃마을에 살던 달건씨가 교통사고로 농사를 지을 수 없다고 땅을

판다기에 나에게 있어 금싸라기보다 더 귀한 땅을 보유하게 되었다.

바로 외씨버선 길에서 옆쪽샛길인 남이정을 끼고 도는 마지막에 있는

애기선바위 옆의 2천여 평 모릉이 밭이다.

현재는 누구나 탐내는 비옥한 밭으로 변하였지만,

20여 년 전에만 해도 뙈기밭 여러 개가 모여 밭구실도 제대로 못하였었는데,

전 주인 달건씨가 결혼하여 선친께 물려받아 손발이 터져 뚜겁살이 배기도록

돌멩이를 캐고 퇴비를 넣어 옥토로 바꾸어 놓았다고 한다.

빈손으로 들어와 10여 년 만에 마련한 나의 땅이라서 나는 힘든 줄도 모르고 밭을 살찌웠다. 해빙이 막 시작되는 이른 봄부터 밭갈이를 치루고 이랑에 비닐피복까지 남보다 먼저 끝내놓고 나의 사랑 고추모종이가 이사 오기만을 학수고대 하였다.

고추는 설을 지내고 며칠 후인 정월 초이레쯤 씨앗을 불려 비닐하우스 안 온실에서

싹을 띄워서 포토에 가식을 하여 4월 중순까지 옥이야 금이야 키워진다.

고추대가 다섯 마디쯤 올라서는 5월초순경이 되면 고추가 마지막 정착하는

밭으로 가 정식이 된다.

나의고추도 55일 터를 잡았으니 벌써 다섯 달이 지나고 있다.

작년엔 여느 해보다 너무한 무더위에 또 초기상달에 가뭄이 극심하고 유독 고추

작황이 시원찮아서 고추 값이 금값이 됐었다. 오직 고추농사에만 고집을 해온

나를 비롯하여 동네에서 고추만을 농사한 사람들은 몇 년 만에 돈 좀 만졌다.

동안 미뤘던 농협에 외상도 해소를 시켰고, 출가한 막내딸에 생활비도 좀 보태주고

하여간 호주머니가 불러 행복한 웃음이 주름진 얼굴에 넘실거렸다.

고추 값 충격으로 작년에 그동안 고추농사가 지긋하다며 다른 작물로 선회했던 옆집 상수 네와 건넛집 덕중 이네도 불편한 심기를 감추고 올핸 너도나도 고추를

심어 댔다. 지난해 같은 귀한 금초를 생각하면서...

작년과는 달리 올봄엔 적당한 강우와 기온으로 일찌감치 고추작황이 풍년냄새를

내 품고 있다.

언제나처럼 우리 부부도 부지런히 약도주고 크는 키에 맞춰 고추대도 박고

줄로 감아줘 태풍에도 넘어지지 않고 튼실하게 잘 자라도록 정성을 심었다.

성장기를 지나 결실기에 접어든 뙤약볕의 8월이 되었다.

8월이 여름의 한복판이라지만 고추에 있어 8월은 확실한 수확의 계절이다.

8월 초순에서부터 따기 시작하여 추석을 쇠고 두벌을 돌려 따면 고추수확은 거의 다 끝나는 것이다. 두벌을 딴 고추는 밑 둥이 잘려져 남은 열매를 물들이는 설움만을 겪을 뿐이다. 다른 작물의 결실기인 서리가 오는 가을에의 고추는 흰점이 생기는 히나리고추가 되에 헐값에 팔려나갈 뿐이다.

8월 수확철의 고추 밭에는 다른 작물과는 달리 색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휴가차 내려와 어제 낮 부용봉에 올랐던 서울 살이 때 옆집의 민정엄마 하는 말

"산위에서 내려다보니 성님네 모릉이 고추밭에 색 점들이 꿈틀거리던데, 무엇이 예요?" 도시 댁 눈에 고추밭에 익은 고추를 따기 위해 각자 끌고 들어간 고랑의

색색의 큰 양산들이 신기했나보다. 고추 따는 철이면 꼭 고추밭에 등장하는 햇볕을 막아줄 작은 바퀴의자에 걸린 파라솔의 풍경이다.

동녘 이슬내리는 이른 새벽부터 어스름이 떨어지는 저녁 늦 나절까지 운동장처럼 넓게 펼쳐진 초록의 긴이랑 속에서 허리 펼 새 없이 달팽이처럼 엉금 거린다.

불과 10여해 전에는 동네 품앗이로 첫 골은 김천 댁, 둘 째 골에는 목포 댁,

셋 째 골은 학골 댁, 그리고 건너 마을의 만수엄마가 품앗이로 와서 땄었는데,

그 새 모두들 한결 세월을 먹어 등이 솟고 허리가 굽어서 요즘은 밭고랑에서 완전 퇴출되었고, 대신에 언제부턴가 밭고랑을 타고 앉은 이들의 면면이 국제화 되어 버렸다. 올해도 어김없이 첫 골은 베트남 댁, 두 번째 골은 캄보디아 댁, 세 번째 골은 필리핀 댁, 네 번째 골은 연변 댁으로 분 냄새 폴폴 풍기는 젊은 다국적이 되었다.

예전의 댁들은 고된 시집살이에서 묻어난 시부모 얘기며, 애들 키우던 얘기며, 젊었을 적의 연애얘기가 긴 이랑에서 고추 가지를 흔들며 스멀스멀 기어 나왔었다.

그러나 요즘의 밭고랑에서는 서로가 낯이 설은 이방인이 되어 그저 소리 없이

이랑의 붉은 고추만 소 젖 짜듯이 잡아당길 뿐이다.

말이 서로 통해 소근 소근 정을 나누면 힘듬도 조금은 사라질 텐데.

외양간 소 닭 보듯 서로가 말이 없고 더운 숨소리만 고랑에 출렁인다.

'낯선 이방인들의 곱고 더운 손길 덕에 혹여 올해도 황금초가 되었으면 좋으련만...'.

어느새 새참시간이 되었다.

예전엔 밭가 떡갈나무 밑에 짚 멍석 깔고 둘러앉아 막걸리도 한잔 주 욱 들이키며 숨을 골랐었는데, 지금은 식성도 각자 색깔들이라 만인 공통의 커피타임으로 참이 바뀌었다. 점심도 세월에 뒤질세라 한통 폰으로 정확히 점심을 맞추는 배달민족으로 변신되었다. 예전의 밭가 무쇠 솥에서 끓여내던 구수한 된장냄새도 밭둑에서

사라진지 오래다.

점심 지나 고추 골 긴 이랑이 끝나면, 뽕잎을 먹은 누에가 똥을 싸듯

빨갛게 매운 고추를 가득 먹은 누런 포대가 열 걸음 거리에 또박 또박 앉아있다.

종일토록 끈덕지게 노동한 수확물이다.

해 거름에 접어들기 시작하면 나의 일은 고추포대를 고랑에서 끄집어 내오는 임무다. 어깨에 포대를 들쳐 맨 나의 얼굴에서 체온처럼 따듯한 유리알이 쏟아진다.

토시를 찬 팔뚝과 등줄기에서도 골짜기 옹달샘물이 흐른다.

잠벵이 속 런닝구의 등짝에서는 구순 아버지의 시어빠진 냄새가, 배꼽 위 가슴

골에는 돌아가신 엄니의 냄새가 새어 나온다.

아이엠에프에 서리 맞고 귀농을 하였지만, 어느새 나도 오십 줄 후반을 달린다.

귀농의 패기 찬 혈기는 산등성이 너머로 사라지고 고래심줄 끈기만이 남았다.

내 뒤를 이어 힘들고 고달픈 고추농사를 질 자식도 없다.

이제는 도시완 달리 농촌도 젊은 사람보기가 어려운 세상이 되었다.

옆집 상수 네의 말을 빌면 예전에 이농이 이슈가 안 되고, 식솔들과 먹고 살기위한 자작농 이었을 때는 웃음과 보람도 많았었단다.

그 때에는 고추 주산단지인 이 마을도 수수깡으로 발을 만들어 햇볕좋은 날에

들락날락하며 아이들 손때도 묻혀서 태양초도 만들곤 했단다.

열손이 부족한 지금은 최첨단 건조기의 근면한 협조아래 밤을 지새우며

아래위로 뒤집어서 이틀 밤낮 만에 수려한 화근초로 만들 수밖에 없다.

탱글탱글한 홍초가 건조기의 마사지로 팡팡함은 넘겨주고

원숙한 건초로 재탄생되는 모습에 머지않은 나의 노년이 깜박인다.

엊그제 마을이장의 스피커 음성이 귀가에 맴돈다.

 

안녕하세요? 부수 골 이장 입니더. 요번 고추수매는 물량이 넘치는 관계로 가격이

작년의 반 정도로 형성되었으니 그리 아시고 대처를 잘 하시기 바랍니더.’

 

뭐래도 나는 명년에 또 고추를 심을 기다.

그런데 왜?

나의 가슴속으로 쓸쓸한 슬픔이 드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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