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십대허리를 감싸안은 내가 어렸을적의 농촌풍경을 뒤적여 본다.
산에 갇힌 조그만 하늘아래 동네에서 태어 났고, 당시엔 비록 보릿고개에 휘어진 허리를 붙잡고 깡마른 체구에
얼굴버짐이 꽃처럼 피어있던 시절이었다.
체형도 아랫배 보다는 위가 있는 윗배가 볼록하게 나오던 세월이었다.
등골이 휘도록 일을하여 생산된 곡물은 마냥허기진 배를 채울 수도 없었다.
지금처럼 화학비료가 흔해빠진 시절도 아니었다.
곡물들의 먹이래야 기껏 사람의 오줌똥인 인분이나
아니면 봄철 산과 들에서 손낫으로 베어다 썩힌 퇴비인 두엄이 전부였다.
당시의 인분 예길 조금 해볼까 한다.
지금은 두메산골에서나 어쩌다 구경 할 수있는 개량된 화장실 정화조가 아닌 독인 단지를 땅에 묻고
발판을 깐 푸세식 뒷간인 변소에서 볼일을 보았다.
자연환경을 먹고 배설한 인분은 잘 후숙되었고 그 변을 영양 밑거름 삼아 곡물들이 자랐났다.
농약없는 진짜 친환경채소들을 부식으로 먹은 어린애들의 뱃속에서는 회충을 비롯하여 여러충들이 서식도 많이 했었다.
시골초등학교에 입학했을때 가장먼저 했던것이 학교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회충약부터 먹였었다.
약 먹은 다음날 죽은회충을 끙끙거리며 배설하였던 경험이 아득하게 떠오른다.
따라서 영양가에 목마른 곡물들도 겨우겨우의 최소한의 소출만 생산 할 뿐이었다.
종자씨앗도 소출한것 중 가장 튼실한 것으로 내년의 풍년을 기약하였다.
그런데도 농부들의 얼굴엔 웃음가득 입가의 주름으로 가득하였다.
그 만큼 먹고살기위한 자급용이었고 욕심 또한 흥부마음이었다.
그런데 산업화를 지나 불과 반백년정도가 지난 오늘 날
언제부터인가 농사를 짓던 농부들은 거대기업인 초국적기업들
즉 씨앗종묘회사와 농약회사 그리고 비료회사 등 기업들의 최말단 생산직 사원으로 전락되었다.
현대의 회사들에 속한 생산직사원들은 노동자의 권익보호와 생존권확보를 위한 노동조합이 결성되어 있지만
현재의 농부들은 이러한 노동조합에 가입도 하지못한 자작농의 신분이다.
그러나 초국적기업의 생산직 사원역할로 한정되어 있는 현실이다.
이들은 종묘회사에서 권장한 종자에 비료회사의 비료를 사용하고 농약회사의 농약을 살포하여 농사를 짓는다.
이렇게하여 키워진 아니 생산된 농산물은 초극적기업들의 뱃속에 부의 축적을 위해 전량 흡수된다.
그 동안의 온갖 간섭과 잔소리와 지청구를 농악삼아 휘어진 허리로 생산된 농작물은 기업의 검열을통하여 수고비를 몇푼받는다.
작물이 잘못되면 전적인 손실은 물론 농부몫이고 농작물이 잘되어 풍년이되어도 이문은 오로지 초국적기업이 차지한다.
농부는 오직 계약에의해 농작물을 키워내는 생산도구일 뿐이다.
농부가 진정으로 대우받고 사는 세상은 어드메쯤 오려나